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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Everybody’s Gone to the Rapture에 대한 잡담.






(어차피 이 글을 읽을려면 이미 플레이 해봐야 하지만 일단 링크)



1.

Dear Esther(이하 에스더)로 유명한 차이니즈 룸에서 지난 여름에 신작 Everybody’s Gone to the Rapture(이하 랩쳐)를 발매했습니다. 일단 전작인 에스더에 관해선 전에 써놓은 글이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하프라이프2의 모드로 에스더가 공개된 이후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더는 다시 다듬어서 상업용 게임으로 발매하였고, Amnesia 프랜차이즈 게임을 하나 발매 했습니다. 이제 차이니즈 룸은 크라이엔진을 사용하고 여러 명의 성우를 기용해서 에스더에 비해서 몇배나 큰 볼륨의 게임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볼륨이 커지면서 랩쳐는 에스더와 비교해서 여러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우선 제일 큰 차이점은 전작에 비해 커진 볼륨 때문에 에스더가 시 같았다라면, 랩쳐는 좀 더 이야기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디어에스더에도 이야기는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진행하기에는 긴 얘기는 무리가 있었고, 그 대신 주인공의 생각이나 정서를 더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꽁꽁 싸매어서 미스터리한 효과를 주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러한 구성은 짧은 게임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볼륨이 긴 게임에서 하기에는 너무 작은 이야기입니다. 반면 랩쳐에서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와서 요우턴이라는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그들의 최후의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에스더에서 주인공의 내면을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해야 했다면 랩쳐는 이야기를 보고 인물들이 어떤 심정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얼핏 보면 미스테리인 척하지만 이야기를 숨기지는 않습니다.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강 알거나 예측할 수 있습니다. 분명 뭔가 더 있을 거란 생각으로 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이 생각한 그대로 일 것입니다. 게임이 끝나고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 마지막 장 케이트 파트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등장인물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외우지 못했다던지 또는 못보고 넘어간 이벤트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스더의 문장을 좋아했던 분이라면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화로 진행되다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케이트 파트에서 에스더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에스더에서 섬은 주인공의 내면을 상징하는 하나의 큰 상징으로 텍스트와 얽히면서 상호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주었다면 랩쳐에서는 상징성이 없어지고 요우턴이라는 마을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공간의 디테일은 아무래도 마을 하나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곤홈이나 사일런트힐즈 PT 같은 게임보다는 적은 편이지만 이 정도면 꽤나 디테일한 편입니다. 이 디테일한 공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천천히 살펴보면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리게 설정되었습니다. 디테일하지만 정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 때문에 리뷰들에서 이동속도를 단점으로 꼽는 것 같습니다.

디테일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도 합니다. 특히 자연표현이 매우 아름다운데 에스더에서 소스엔진으로 지금 봐도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냈던 차이니즈 룸인 만큼 크라이엔진을 사용한 랩쳐에서는 그보다 뛰어난 표현을 보여줍니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재현하였기 때문에 제한적이지만 오픈월드가 되었습니다. 마냥 선형적이었던 에스더 때와는 달리 비선형적인 이야기 진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텍스트가 시간에 묶이지 않고 공간에 묶여버렸기 때문에 정교한 이야기 구성에는 힘이 듭니다. 영화로 따지자면 한편의 영화를 시퀀스 단위로 쪼개서 무작위로 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1 비교는 조금 무리인 것이 영화는 순서대로 재생될 것을 고려해서 만들지만 랩쳐는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을 알고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는 긴밀히 이어졌다기 보다는 분절되어 있는 편이며, 완급조절이 불가능합니다. 이 게임을 한번 깨본 것이 아니라면 텍스트를 보는 순서는 그저 우연에 맡기기 때문에 플레이어 입장에서 텍스트를 보는 순서를 최적화 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간에 텍스트가 묶여있기 때문에 게임을 알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 순서로 진행시키는데도 무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텍스트를 놓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게임을 클리어하더라도 반 토막인 이야기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게임 밖에 못하는, 게임다운 이야기 구성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야기로서 정말 좋은 구성인지는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랩쳐는 이야기의 날 재료를 던져줍니다. 이걸 조리해야 하는 것은 순전히 플레이어의 몫이 되어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럴 거면 왜 식당에 왔냐면서 투덜대면서 고기를 구울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직접 구워야 제 맛이라며 고기를 구워 먹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은 요리사는 아니기 때문에 고기를 태워먹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미료를 치기도 할 것입니다. 이야기의 가능성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가능성이 넓어집니다. 하지만 랩쳐가 우리에게 나쁜 재료를 주었다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요리하던 간에 나쁜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처음 플레이 한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들 것입니다. 제일 큰 문제는 다양한 등장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세어본 바로는 이름만 언급되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32명 이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는 인물 모델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기억할 방법은 목소리와 이름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름은 작품 내에서 애칭으로 불리거나 성으로 불리거나 이름으로 불리거나 하는 둥으로 다양하게 불려지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사람이라면 이해에 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많은 인물들이 20시간 이상 하는 게임도 아니고 4~5시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다 등장하니 이해에 어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임은 등장인물을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이벤트를 보지 못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냥 끈기를 가지고 모든 지역을 돌아다녀보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등장인물도 파악하고, 모든 이벤트를 봤더라도 그래서 이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서 막힐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마지막 케이트 파트에서 친절하게도 이야기 해주지만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 위주로 진행되던 게임이 갑자기 캐서린의 함축적인 독백으로 이어지면서 텍스트의 난이도가 확 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게임들이 잘 하고 싶으면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플레이를 합니다. 랩쳐도 마찬가지로 이 게임을 잘 하고(이해)하고 싶으면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이 작은 규모의 팀으로 오픈 월드 게임을 만드는 것은 무리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또, Dear Esther와 Gone Home에 변화를 준 스토리 중심의 게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유저들은 스토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는지는 신경 쓰지 않으며 아무런 지시나 일방적인 미션 없이 요우턴 마을을 자유롭게 탐험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인내심을 갖고 전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불평에 불과합니다. -출처

차이니즈 룸이 이번 랩쳐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이 유행시킨 흔히 비꼬는 말로 워킹 시뮬레이터라고 불리는 스토리 중심의 게임의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에스더와 달리 이번엔 게임적인 특성을 살려서 특히 탐험이라는 요소를 활용하기로 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탐험할 가치가 있는 디테일한 공간과, 어느 방향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비선형적인 텍스트가 필요로 했습니다.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순서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분절화 된 텍스트를 이용한다던가, 상황에 맞춰서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스탠리 패러블에서 비꼬았듯이 자유로운 척하지만 결국 제작자의 의도 안에서 노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선형적인 스토리텔링과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이에 대해서는 껍질인간님의 스탠리 패러블 리뷰를 참고), 무엇보다 개발에 자원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도 위에서 얘기했듯이 미적으로 최적화된 이야기를 볼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게임들이 오픈월드, 샌드박스 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과연 시나리오도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아니면 선형과 비선형 스토리의 차이는 둘 중에 뭔가가 더 우월하다는 것보다는 그냥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요? 아직 만드는 이나 보는 이나 마찬가지로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 선형적인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채로 살아왔습니다.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가능해졌고, 우린 아직 이러한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걸음마 단계입니다.차이니즈 룸의 이러한 도전이 성공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도전이 랩쳐에서 그친다면 매우 실망적일 것입니다. 꼭 차이니즈 룸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점점 발전된 게임을 선보인다면 좋겠습니다.



2.

이 이야기는 멸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절대 이야기는 어떻게 죽었느냐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죽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의미를 갖고 비로소 죽음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요우턴의 주민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작중 배경이 되는 요우턴은 1984년의 영국 시골 마을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외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스티븐이 케이트를 데려올 때 미국인이라는 점과 유색인종인 것 만으로 머리가 둘 달린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작중에서 ‘패턴’으로 불리는 존재도 좀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외지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케이트와 패턴은 외지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게임이 소통,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자를 부각시키게 됩니다. 패턴은 우선 우주에서 온 인간과 다른 방식의 생명체라는 점부터 누구도 의심할 여지 없는 타자입니다. 거기에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소통하고자 해서 사람들이 피를 쏟고 죽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패턴을 두려워합니다. 케이트는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게 딱히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녀는 스티브가 말했듯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또 바꿔 말하자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가뜩이나 그녀가 스티브의 부탁에 반 강제로 온 마을은 서로 똘똘 뭉쳐있지만 타인에게는 배타적인 곳입니다. 요우턴은 케이트가 말한 대로 하나의 색이 다른 모든 것을 가려버린 그런 곳입니다. 그런 장소에서 그녀는 고립되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지도 잘 모릅니다. 웬디는 리지에게 스티브를 뺏어오라고 하질 않나 그나마 자기 편인 스티브 조차도 바람을 핍니다. 이런 곳에서 그녀는 ‘애플턴’이라는 성씨를 딱히 쓰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애플턴 부인이 맞냐는 질문에 그녀는 콜린스 박사라고 정정까지 합니다. 특히 유일한 아군이었던 스티브와의 관계는 바람핀게 들통이 난 것과 함께 ‘패턴’에 대해서 의견차이까지 나자 그녀의 유일한 아군은 자신과 같은 외톨이 신세인 ‘패턴’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요우턴 사람들이지만 본인들의 인간관계도 꼬여있습니다. 프랭크는 아내인 매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그 이후로 웬디와 서먹하게 지냅니다. 웬디는 제레미가 매리에게 모르핀을 투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니꼬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지는 알콜 중독자인 로버트와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꼬여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비정상은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평범한 그런 관계들입니다.


패턴은 무엇일까요? 일단 그것은 우주에서 왔습니다. 이를 처음 발견한 스티브와 케이트는 이것을 전파망원경 같은 걸로 관측했을 것이고 대칭적인 ‘패턴’으로 그 실체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패턴이라고 부릅니다. 패턴은 외롭습니다. 케이트도 그걸 알고 스티브도 그걸 압니다. 케이트는 그것이 외로운 것을 알고 동정했고, 스티브는 그것이 외로운 것을 알고 최후의 복수로 생각 해낸게 자살로 패턴 혼자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작중에서 이 패턴을 상징하는 기호는 ∞입니다. 무한대를 표시할 때 쓰는 기호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에선 무한보다는 ‘영원’을 상징한다는 편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패턴을 그릴때 마치 나비처럼 그립니다. 이러한 기호와 나비의 특징은 대칭적이라는 점입니다. 대칭은 하나 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습니다. 다른 짝이 있어야만 비로서 대칭구조가 가능합니다. 마치 인연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내게 스티븐과 리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는 둘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프랭크는 매리와 함게 밭을 걷고, 웬디와 에드워드는 사랑의 결실인 과수원에 함께 보금자리를 만든다. 제레미는 마침내 자신의 신 곁에서 평화를 찾는다. 모두가 함께이기에 행복하다. (...)

제레미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모든 이가 다른 이와 짝을 이룰 때 제레미는 혼자서 신과 짝을 이룹니다. 그는 원주민은 아니고 파견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마을을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고 이 게임에서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리에게 모르핀을 투여한 문제로 웬디와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언짢게 생각하는 웬디에게 로마서를 인용하며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장 1절) 그가 신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라는 말을 했지만, 패턴의 존재를 깨달은 이후에 죽어서도 자신들의 신자를 돕겠다고 말한 것이나 최후까지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아 끝까지 신앙심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곳에 얼굴을 비추는 제레미의 이야기는 결국 신앙심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레미는 게임에서 말한 ‘인연’에 사람 말고도 다른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캐릭터입니다. 너무 정의롭고 기능적으로 작동해서 재미도 없고 감정이입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특별한 예외인 제레미를 제외하고는 따로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게임에서 나열된 이야기들은 마지막 챕터인 케이트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합쳐진다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는지 해설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아하지 못하고 매우 투박하게 이야기를 봉합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해설을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 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구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지막 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것이 누구를 해칠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째서 리지가 아이와 함께 떠나려 했는지, 그녀를 막은 것이 왜 잘못인지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것이 저지른 일이 대부분 잘못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것은 내게 스티븐과 리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는 둘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프랭크는 매리와 함게 밭을 걷고, 웬디와 에드워드는 사랑의 결실인 과수원에 함께 보금자리를 만든다. 제레미는 마침내 자신의 신 곁에서 평화를 찾는다. 모두가 함께이기에 행복하다. 나는 이제 이것을 한층 더 잘 이해한다. 이것은 바로 수집가이다. 시간의, 그리고 나비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는 덧없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패턴도 이를 두려워하는 인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패턴은 인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체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인연들이 없어지는 것들을 보았을 겁니다. 덧없이 주변의 인연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패턴은 이러한 인연들을 수집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시간을 곁에 묶어두려 했다. 어둠을 두려워하며 빛을 바닥으로 비추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빛에 매달리는 것은 삶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수많은 별들이 수명을 다해 떨어지며 내는 빛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왔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은 육신의 죽음을 초월한다. 우리의 삶이 만드는 패턴은 어둠을 건너는 다리를 만든다.

랩쳐에서 이러한 허무의 치료에 인연을 처방합니다. 영원한 것은 결코 허무에 좋은 처방은 아닙니다. 패턴이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는 건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유한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사실 별과 떨어진 만큼 오래된 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이미 터져서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빛을 내뿜고 있고 이 빛은 누군가에게 보여짐으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수명을 다하더라도 그 의미는 다른 관찰자에 의해서 계속 남아있게 됩니다. 이러한 인연의 존재가 우리를 허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탑의 그림자에서 뻗어나와, 천문대를 지나, 계곡을 넘어 세계를 집어삼킨다. 이제 모든 것이 빛이 되어, 모든 것이 멈추었다. 세계는 우리가 새겨 만든 자취로 구성된다.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다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준다. 이 세계는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우리가 없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빈 밭과 집에는, 우리의 자취가 빛을 발하고 다른 이들은 우리가 비추는 빛 안에서 춤을 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 않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이 계속될 것임을 알기에.

시간은 어차피 계속 흐르고 이러한 인연도 결국 찰나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 할 사람조차 없어 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고 없어져도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는 그 사실 자체만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연인들이 헤어지더라도 한 때 그 둘이 사랑했었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이 곳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에 이 세상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 했었고 앞으로 우리가 없더라도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 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크게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끝난다는 건 당연한 겁니다. 시간을 애써 곁에 묶으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패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두렵지 않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멀리했고 접촉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실패를 이제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관 없다. 모두가 사라졌고, 나도 그들과 곧 재회할 것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채 태어나 끝없는 어둠의 대양에서 흔들리는 유목처럼 금방 파도에 휩쓸려 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한 줄기 빛 아래의 춤과 같은 하루의 삶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으니 사랑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내재된 존재인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짝을 찾았다. 이 패턴은 내 것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결코 달콤한 것은 아닙니다. 요우턴 주민들의 어딘가 삐걱거리는 인간관계들처럼 고통스러운 일들도 많습니다. 리스와 레이첼처럼 가족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인연들도 있고, 리지와 로버트처럼 잘못된 결혼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프랭크는 매리를 사랑했지만 그만큼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인식되는 우리의 별빛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를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국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타지에서 누구와 동화되지 못한 케이트는 주변에 유일하게 남은 패턴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패턴은 우리와 다른 방식의 생명체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들처럼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서로 너무 사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은 어긋나고 오히려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패턴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완벽에 가까운 타자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서로 소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서로 소통을 하면서 끝을 냄으로써 결국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원하면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서로 소통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케이트만은 패턴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인 ‘이 패턴은 내 것이다.’라는 말은 패턴이 나비와 같은 대칭모양을 가지고 있고 이게 인연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중의적인 표현이 됩니다. 패턴을 ‘인연’으로 대치해서 ‘모두가 자신의 짝을 찾았다. 이 인연(짝)은 내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Everybody’s Gone to the Rapture는 차이니즈 룸에서 야심을 갖고 만들었지만 아쉬운 점이 많은 게임이었습니다. 그래도 스케일이 커지고 퍼블리셔를 두고 발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니즈 룸의 색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다음 작품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PS.

크레딧의 마지막에서 숫자가 나옵니다. 이를 1=A, 2=B … 이런 식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완성됩니다.

In the wake of a human being's death, what survives is a set of afterglows, some brighter and some dimmer, in the collective brains of those dearest to them. There is, in those who remain, a collective corona that still glows. Douglas Hofstadter

이는 Douglas Hofstadter의 저서 I am a Strange Loop라는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PS2(2016년 4월 24일 추가).

랩쳐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과 이름 그리고 별칭으로 불리기 때문에 누구를 지칭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랩쳐의 PC 플랫폼 버전이 발매된 김에 전에 이 글을 쓰면서 사용했던 등장인물을 정리해놓은 메모를 올려놓겠습니다. 

-()괄호 안의 명칭은 별칭입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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