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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에 대한 잡담.






1.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가 이거 다 못 깨면 못 나간다 식으로 말하길래 놀아주는 겸 플레이 해봤습니다. 그래픽은 풀옵으로 돌렸고, 난이도는 일반으로 했습니다. 친구들이 제가 깨는 걸 지켜보기 때문에 제가 평소에 하듯이 구석구석 쑤셔 다니면서 문서 차분히 읽고 하는 방식으로는 못했고, 빠르게 스토리 진행만 했습니다.

 

2.

기존의 에일리언 게임들은 해보지는 못 했지만 대다수가 영화 에일리언2에서 따온 제노모프들을 잡아 족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원작인 에일리언1을 컨셉으로 잡습니다. 우주 한복판에서 인간들이 제노모프와 감금된 채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야기입니다.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마치 그러한 점을 알아주길 바라듯이 1편을 연상시키는 것들을 많이 넣었습니다. 요즘 SF에서는 나오지 않는 CRT모니터라던가 복고풍의 UI가 쓰입니다. 세바스토폴 우주정거장의 디자인은 역시나 영화1편을 연상시킵니다. 영화 1편에서 안드로이드가 리플리를 잡지를 입에 넣어서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이솔레이션에서도 잡지를 입에 문 채로 죽은 시신이 보입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아이솔레이션의 주인공 아만다 리플리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주인공인 엘렌 리플리의 딸로, 에일리언1 이후에 실종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세바스토폴 우주정거장에 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1편을 연상시킵니다.

 

3.

외형은 매우 맘에 듭니다. 방금 얘기 했듯이 영화 1편에서 따온 정거장의 디자인이고 유저 인터페이스도 이에 맞춰서 단말기나 동작 감지기 같은 물건들은 1 bit 색상입니다. 거기에 웬만한 꾸밈없이 단순화 시킨 디자인들이고 HUDVHS에서 재생할 때 나오는 노이즈가 낍니다. 이러한 구닥다리(?) 외형은 스팀펑크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매력적인 디자인입니다.

캐릭터들은 요즘 게임답지 않게 얼굴 표정이 내내 굳어 있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크레딧을 보니 얼굴 애니메이션 엔진도 따로 있던데 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4.

게임의 구조는 A에서 B로 이동해야 하는 목표가 존재하고, B로 이동하기 위해서 다른 장소를 들려서 스위치를 작동하거나 가젯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전에 가지 못한 문을 열 수 있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 사이에 제노모프와의 잠입공방이나 인간과 안드로이드와의 싸움을 채워 넣는 식입니다. 인간은 거의 제노모프와의 공방에서 변수로 작용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수준입니다. 안드로이드는 주로 제노모프와의 공방에 지친 플레이어가 쉬기 위해서 나오는 제노모프가 등장하지 않는 스테이지에서 적으로 나옵니다. 안드로이드와의 싸움은 결국 휴식을 위한 땜빵에 불과한 수준이고, 제노모프의 공백을 메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5.

역시나 이 게임에서 제일 재밌는 부분은 제노모프와의 싸움입니다. 제노모프와 플레이어의 교감에서 제일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꼬리입니다. 몇몇 동작을 제외하고 제노모프의 꼬리는 다른 신체부위와는 다르게 물리 엔진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꼬리가 땅에 질질 끌리게 되는데 특히 게임 특성 상 수그려서 이동하거나 책상 밑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꼬리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꼬리를 보면서 제노모프가 근처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는 불확실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거기에 뱀이 기는 듯한 꼬리의 움직임을 보면 소름이 끼칩니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노모프는 몇몇 스크립트 된 연출을 제외하고는 순전히 AI에 의해서 행동합니다.(이는 다른 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보통 이 게임을 하다가 놀라게 되는 지점은 연출된 부분이 아니라 (딱히 이 게임은 연출로 놀래키려는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AI의 돌발적인 행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인공지능은 별 감흥이 없지만 제노모프의 인공지능은 꽤 뛰어나서 정말로 거기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히 똑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정도까지는 아닌 제노모프의 지능과 유사한 느낌을 줘서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이건 최근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유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진이 인공지능이 대답하기 곤란한 이야기를 어린애라서 모른다고 얼버무려도 이해하는 것처럼 제노모프가 조금 멍청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건 인간이 아니라 제노모프니까 납득합니다. 제가 클리어한 일반 난이도 기준에서는(다른 난이도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잠입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이걸 왜 못 봐?' 상황이 벌어지긴 하지만 이건 난이도 조절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냥을 당하는 것은 플레이어지만 재미있게도 제노모프가 아닌 플레이어가 사냥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제노모프가 수동적인 게 원인인데 플레이어는 제노모프를 동작감지기와 소리, 그리고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제노모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일시적이지만) 여러 아이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제노모프는 그냥 돌아다니다가 플레이어가 소리를 내거나 눈에 보이면 쫓아가는 등 수동적인 입장입니다. 가끔 예외가 있는데 플레이어의 위치를 읽고 환풍구에서 매복을 한다든가 플레이어가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가는 척 하면서 간을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아무튼 제노모프와 플레이어와의 관계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 아닌 거의 동등한 입장입니다.(정확하게 따지면 플레이어가 조금 유리한 정도일 겁니다.)

화염방사기는 흥미로운 싸움을 밋밋하게 만듭니다. (뭐 그래도 하다보면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엉엉' 같은 상황도 오긴 합니다.)화염방사기는 플레이어가 제노모프와의 공방에서 어떤 일을 잘했든 못했든 간에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죽어서 게임이 로드 되어도 없던 일이 되는 건 같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임무를 포함해서 모든 건이 뒤로 돌아가고 전자의 경우에는 진행도는 그대로 남습니다. 당연히 화염방사기의 연료는 난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거 때문에 게임이 쉽다면 안 쓰면 그만일 테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6.

이 게임에서 세이브는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세이브도 귀찮은 유저들을 위해서 체크포인트를 이용하는 요즘 게임들과는 다르게 플레이어는 세이브 포인트까지 가서 적에게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세이브 해야 합니다. 거의 세이브를 인질 삼아서 협박을 하는 수준입니다. 이십분의 노력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서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게임의 긴장감은 플레이어가 세이브한 지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가에 비례됩니다. 세이브는 게임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게임의 내부로 들어와 일부가 됩니다.

 

7.

의외로 이 게임은 호러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굳이 호러 게임이 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호러 게임의 문법을 좀 빌려 오긴 했지만 말이죠.) 이 게임의 목적은 영화 1편의 느낌을 살리는 것입니다. 공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건 그저 에일리언1편이 공포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게임은 생존 게임과 비슷합니다. 맵 곳곳에 있는 한정적인 자원들을 수집해서 물건을 만들고, 또 이를 적시적소에 활용해서 위기를 모면해야 합니다. 수요에 따라서 즉석에서 아이템을 만드는 행위는 아이템 조합을 번거롭게 재료를 하나하나 선택해서 집어넣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듭니다. 차라리 여유가 어느 정도 있을 때 수요를 예측해서 미리미리 만드는 편이 좋습니다. 이런 자원관리의 중요성은 이 게임이 암네시아 류의 공포 게임보다 라스트 오브 어스 같은 생존 게임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제노모프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드로이드들을 상대할 때 더 많은 아이템을 사용했습니다. 안드로이드를 회피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족족 죽여 버리느라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이 멍청하고 느린 것들을 달고 뛰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게 맘도 편하고 더 재밌었습니다.

 

8.

친구들이 구경하면서 게임을 하느라 단말기의 글들을 제대로 읽어서 자세하고 상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외부적으로 보이는 시나리오는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이야기는 단순히 게임을 위해서 존재하는 수준입니다. 에일리언 1편에서 실종된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세바스토폴 우주정거장에 왔지만 사람들은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고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을 다 죽이려고 하고 거기에 제노모프가 돌아다니는데 실종된 어머니 따위가 뭔 대수이겠습니까? 제노모프를 상대하기 위해서 주인공 아만다는 동료든 모르는 사람이든 호구를 자청하면서 혼자서 죽을 고생을 다합니다. 아만다는 게임 내내 누워있기만 해서 이야기에 큰 비중도 없는 니나 테일러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여성인데 남정네들은 대부분이 거의 무력하기만 하고 아만다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기만 합니다. 강한 여성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것을 알겠는데 덕분에 매력적인 캐릭터는 이 게임에서 한 명도 없습니다. 애당초 직접 대면하는 일도 적고 무전기로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만 하는 놈들이라서 미운 정조차 붙일 사람이 없습니다. 이 게임에서 제일 교감을 많이 하는 상대는 결국 제노모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의 이야기는 성취라는 것을 절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든 한 번에 성공하는 꼴을 못 봤습니다. 항상 가고자 하는 길은 막혀있고 난관이 존재 합니다. 그런 일은 막힌 길을 뚫어야 하는 게임 구조 상 그럴 수 있다 쳐도 그 난관을 돌파했다 해서 어떤 일이 진행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일은 다시 물거품이 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짓을 해야 합니다. 순전히 게임 분량을 위해서 억지로 늘려 놓은 이야기 같습니다. 계속 실패만 하는 주인공은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했고, 심지어 게임의 엔딩에서 조차도 주인공은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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