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

허스토리에 대한 잡담

 

 

 

※스포일러 주의
보통 줄거리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거기서 복잡해지면 시간 순서를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 순서를 바꾸어도 작가가 의도한 순서대로 줄거리를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진행을 벗어나기 위해선 책이라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고 다 읽으면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고 해야 합니다. 영화라면 시퀀스 마다 잘라서 임의의 순서대로 봐야합니다.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접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엉망진창일거란 생각부터 들 것입니다. 감정선은 제멋대로이고 이야기에서 중요한 비밀을 먼저 알아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보통 영화나 책은 선형적인 구조인 것을 전제로 하고 디자인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선형적인 구조를 가진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아무 순서대로 접근해도 괜찮은 이야기는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할까요?
허스토리는 아무런 순서대로 접근가능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구조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매우 짧기는 하지만 처음과 끝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렇게나 접근이 가능합니다. 방금 전에 아무렇게나 라고 했지만 정말로 아무렇게나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듣고 특정 키워드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 키워드를 검색해서 그 키워드와 관계있는 다음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이 방식이 훌륭한 게 단순히 무작위로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는게 아니라 유저가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게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야하는 추리 게임이지만 시간 순서 상 후반부의 영상을 보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어디서부터 접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순된 진술이 자주 보여서 뭐가 진짜인지 알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보가 모이기 시작하면 모순되어 있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본 영상이라도 유저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해서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유저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서 같은 영상을 다르게 느끼는데 아예 다른 유저끼리는 오죽할까요? 이러한 접근은 유저들 마다 독특한 경험을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게임에서 영리했던 점은 쌍둥이라는 설정을 넣어서 화자가 서로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무 순서대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추리 장르에서 너무 쉽게 진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쌍둥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화자의 언행이 모순되기 때문에 화자를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쌍둥이라는 것을 알아내도 현재 화자가 언니인지 동생인지 확인해야 하고, 지금 이 쌍둥이들이 지금 어떤 일을 모의했는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여러 궁금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결국 진상을 알기 위해선 모든 이야기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들이 있습니다. 우선 유저에게 어떤 감정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내기 힘듭니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 자체가 아무렇게나 접근해도 괜찮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게임의 스토리의 제일 작은 한 조각은 감정적인 부분은 최소화하고 퍼즐의 한 조각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저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스위치처럼 껐다가 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긴 기간을 가지고 설득을 해야합니다. 그 때문에 이야기에 무작위으로 접근하는 유저의 의도를 예측하고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감정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는 힘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파악해야 하는 필터를 한 번 거쳐야 합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이입하기도 힘듭니다. 우선 유저들은 시작부터 캐릭터들의 진술자체를 믿지 못합니다. 얼핏보면 모순된 진술을 하는데다가 행동동기를 알려면 이야기 전체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이입하긴 힘듭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유저에게 많은 것을 위임하지만 모든 유저는 좋은 유저가 아닙니다. (꽤 많은 유저들이 수동적으로 매체를 받아들입니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즐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재료가 필요하지만 그걸 요리하는 것은 유저의 몫입니다. 유저는 이야기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가공해서 이해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키워드를 검색해서 다시 이야기를 보고 다시 이해를 하는 과정을 반복해야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유저 탓이 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재료에서 좋은 요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에 대한 잡담  (0) 2018.03.13
디텐션:반교에 대한 잡담  (0) 2017.08.11
스팀 컨트롤러 샀는데..  (0) 2016.11.06
레플리카에 대한 잡담  (0) 2016.08.08
소마에 대한 잡담  (1) 201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