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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디텐션:반교에 대한 잡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엔딩, 배드엔딩 모두 참고해서 썼지만 진엔딩의 관점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각주:1]


 


1.
반교의 퍼즐은 정교한 규칙을 가지고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이 된 퍼즐이 아니라 다른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과 비슷한 구성을 보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구성하고 그 상황을 타개하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쯔꾸루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맥락 없이 퍼즐이 놓여 있는 구성을 보입니다.
프롤로그와 1장과 2장은 매우 평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배경이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상황이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생기면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 문제 인식에 기반을 두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의 행위에 맥락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저는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기보다는 탐사에 기반을 둔 소극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행위의 당위성은 그저 빈 자리로 둬버리고 그 자리를 어드벤처 게임의 장르 문법이 대신하고 있으므로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듭니다. 행위에 동기가 없으니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게 되고 행위에 의미가 없기에 플레이어캐릭터의 행동이 게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조화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 게임의 초반부들은 현실적인 배경이 무너지는 후반부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준비를 하게 해주고,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가지게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3장 4장에서는 그나마 남아있던 현실적인 배경이 무너지고 방예흔의 마음을 따라가게 됩니다. 전 장에서처럼 상황적인 맥락이 없지만 배경 자체도 초현실적인 데다가 방예흔의 저지른 일의 동기를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앞에 장들보다 유저의 행위들이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앞 장처럼 몇몇 퍼즐들이 소품처럼 활용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3장에서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중점을 두어서 퍼즐의 복잡도는 2장보다 쉬워지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4장에서는 일직선 진행이나 다름없는 간단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후반부 장은 게임 안에 있는 아이템들에 은유를 내재하고 그에 맞는 퍼즐을 구성했기 때문에 전반부의 퍼즐들보다 더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2.
이 게임에서 무대는 자주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방예흔이 처음 등장하는 곳도 학교 강당이고, 2장의 인형극과 음악실, 3장의 연극 시퀀스, 4장 배드엔딩에서 표창 수여식처럼 많은 부분에서 등장합니다. 이 게임에서는 남의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음악실의 섬뜩한 박수, 배드엔딩에서 목을 매는 장면 등을 볼 때, 결코 타인의 시선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게임은 타인에게서 자유로워 지고자 했던 사람들이 몰락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장 선생이 주도하는 독서 그룹의 멤버들은 사상의 자유를 갈망합니다. 방예흔은 처음엔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굴복하여 어머니와 같은 밀고자가 됩니다. 그 이후에 밀고자로 낙인이 찍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받고 자살을 하지만 죽어서조차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방예흔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는 이유는 자유를 위해서 직시하기보다는 도피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에서 비중이 높은 것은 어머니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관해서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전에는 좋았던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저 재난일 뿐이지 이유는 딱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예흔이 더 미워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진짜 사람들에게 말하는 대신 신에게 말하는 사람이고, 잘못된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방예흔은 그런 그녀를 처음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신께 내 자신으로서 살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묻는 사람입니다. 처음엔 그녀처럼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졸업 이후에 그녀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고, 화를 내지 않는 그녀에 대해서 미워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와 직접 해결하지 않고, 밀고를 통해서 아버지를 삶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이런 비극 속에서 그녀는 자유를 원합니다. “아무도 날 모르는 외국 땅에서 깨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장 선생은 매우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외국에 유학까지 한 적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유로워 보이는 그에게 방예흔은 빠르게 빠져들었습니다. 장 선생도 그녀를 좋게 보았고 둘 사이는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장 선생은 "제 때에 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방예흔은 그에게 의존하는 것이었고, 장 선생은 그녀가 자신이 없어도 주체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예흔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자 상담을 중지했습니다. 그걸 몰랐던 방예흔은 장 선생에게 접근하고자 하다가 은 선생과 장 선생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거기서 그녀는 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게 됩니다. 방예흔이 어머니와 다르게 당사자에게 말해서 해결하고자 했으면 오해가 풀렸을 것입니다. 대신 그녀는 어머니가 바람 핀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도 밀고를 해버립니다.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기란 힘든 일입니다. 외부환경, 특히 나와 다른 주체 때문에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엄령 하의 대만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환경의 좋은 예시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수천 년 전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조차도 사람이 자유롭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 이후에도 하지 말라는 건 거의 다 하는 인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진리 그 자체인 신도 어쩔 수 없는 게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했지만, 자유라는 것은 빈 공백과 같아서 그 허무함은 사람을 두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비어있는 공간을 무조건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방예흔은 자유로워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유로워 보이는 장 선생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주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자유롭듯이 다른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합니다. 장 선생이 방예흔에게 했듯이 말이죠. 그리고 주체들 간에 문제가 생겼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해당 주체들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방예흔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장 선생과의 문제는 장 선생과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했던 것처럼 장 선생을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상대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오해를 풀 기회를 그렇게 날려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은 많은 실수를 동반합니다. 그럴 때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임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거울들은 그 잘못을 직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는 그림자가 되어 방예흔을 따라다니면서 “나는 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지 않은 그녀에게 “아직 너가 내가 아닐 뿐”이라고 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이 게임에서 자유의 상징이 종이비행기가 되어버린 것에서 모든 비극이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종이비행기는 자유롭게 날아가지만, 그저 떠나버립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그런 속 좋은 것이 아니라 힘든 투쟁의 길입니다.도피를 거듭한 끝에 그녀의 최후는 “세상을 등지고 도약”해버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녀가 비록 좋은 주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도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녀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거치는 기나긴 과정일 것입니다.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고 배워가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말이죠. 실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생에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도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수선화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남들이 다 포기한 싸움을 이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3.
하지만 정말 사람은 주체적인 걸까요? 이 게임에서는 주체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바람에 구조적인 문제의 비중이 작게 나옵니다. 그럴만한 게 이 게임의 공간은 방예흔의 죄를 묻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고,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자유로운 주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 놓여 있다면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면 그 사람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면 당연히 죄는 그녀를 둘러싼 구조에 물을 수밖에 없고, 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죄의 무게를 분담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방예흔이 받는 영원한 저주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 만의 죄가 아니니까요.
방예흔의 어머니를 봐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사람에게 말하는 대신 신에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에게 말해봤자 쓸모가 없었던 환경이라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밀고를 비난하고 싶어도 이 이야기에서 그녀의 남편이 다루어진 방식을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태풍과 같은 재난으로만 느껴집니다. 과연 그에게 직접 말을 했다고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흔히 사람들은 모든 잘못에는 그 잘못을 저지른 주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책임을 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책임지는 사람만 바뀌고 같은 문제는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지금도 몇몇 국가나 단체에서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알면서도 바꾸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고의로 몇몇 개인의 문제로 돌려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예흔을 그런 사람으로 만든 건 그녀의 가족들이었고, 그녀가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일 수 있게 한 건 (독서 장부의 아이콘이 권총인 거로 보아 방예흔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계엄령 하의 대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방예흔은 작은 불꽃이었지만 불쏘시개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큰불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해서 주체성을 부정하면 죄를 묻기 곤란해지기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그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방예흔을 보는 시각은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처럼 무작정 타자화된 그런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주체성을 인정하지만, 그녀가 안 좋은 환경에 살았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녀를 사람들이 이해 못 할 괴물로 만들어서 다루었다면 그녀에게 내린 저주가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알면서도 왜 그녀에게 연민을 가지면서 그런 가혹한 저주를 내린 걸까요?
끝나지 않는 저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대한민국도 포함해서 수많은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국민을 상대로 학살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오래 흘러버렸고 아직 아픔은 남아있지만, 누구의 잘못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미해결인 채로 끝나버렸습니다. 남은 사람에게는 답답함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그 고통을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가뜩이나 그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더 갑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저주는 그런 갑갑한 상황에서 희생자들이 바라는 그런 저주입니다. 방예흔 같이 사연 있는 사람도 이렇게 벌을 받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커트라인이 매우 높게 잡혀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넘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본인 입으로 나는 그때 사연이 있어서 그래 라는 말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책임을 졌다면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죄를 치렀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사람들만 처벌하고 정작 중요한 것들은 묻어두지 않았을까? 이런 이야기들 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은 미해결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이 저주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살아 남아버린 사람들이 내리는 저주입니다. 그들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기를 바라면서. 이제 와서는 절대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절대로.

 

 

"나는, 너다.
아직 너가, 내가 아닐 뿐.

 

 

 

 

 

  1. 사실 저는 진엔딩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가짜 엔딩이라는 것도 있나요? 다른 엔딩들도 그 만의 가치가 있어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잘못 만들어진 엔딩일 뿐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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