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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에 대한 잡담




※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 1.02버전 / 어려움 난이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제가 12살 때 마트에서 화이트데이와 오재미[각주:1]가 들어있는 주얼 CD를 샀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깨진 못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교무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튕겨서 못했었고 몇 년 뒤에 했을 때는 아기 귀신에게 토우 인형을 주면 튕겨서 결국 엔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소년은 예비군 5년 차가 되어서 화이트데이 리메이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엔딩까지 가는 데 성공했죠.

전작과 비교해서 귀찮았던 퍼즐들을 요즘 시대에 맞게 리뉴얼하고 엔진과 에셋들도 싹 갈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설정만 있고 넣지 못한 귀신들을 새로 추가하였습니다. 원작과 제일 큰 차별점은 역시나 그래픽이겠지만 그다음은 새로 생긴 컨텐츠입니다. 전작을 즐겼던 사람들이라도 새로운 느낌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메인 줄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이걸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만날 일도 딱히 없고, 게임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 그냥 단순한 수집요소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추가된 귀신들이 학교 괴담이라는 한 테마로 묶여있긴 하지만 그 외의 통일성도 딱히 없이 머릿수로 밀어붙이다 보니 귀신 다이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서 화이트데이를 관통하는 디자인 철학이 빤히 보이게 됩니다. ‘많이 플레이하는 것’입니다. 도전과제만 봐도 단순 반복을 요구하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옛날 화이트데이부터가 원래 그런 게임이긴 했습니다) 무엇보다 화이트데이다운 반복플레이는 엔딩모으기 일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루트가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이야기의 큰 줄기들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10%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같은 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유튜브의 시대에서 일반적인 유저들이 이러한 것을 참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새로 추가된 것들이 기존의 게임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수집요소 수준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하지만 메인 줄거리와 큰 차별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을 진행하는데 많은 잡음이 생겨버립니다. 내가 획득한 아이템이 메인 줄거리를 위한 것인지 그저 수집요소인지 그냥 경험으로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노이즈들은 다음에 말할 요소 때문에 더 짜증 나게 다가옵니다.


화이트데이의 퍼즐들은 문제 제기가 명확하지 않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서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지 않아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퍼즐들도 있습니다. 리모콘으로 시디 빼서 키 얻기라던가 에어컨으로 종이 빼기라던가..)  게임이 잘 안 풀릴 때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처럼 될 때까지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짓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때의 시행착오는 다크소울의 시행착오랑은 다르게 재미가 없다는 건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좀 하신 분들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거기에 유저들을 산만하게 만드는 수집요소들과 이런저런 시도에 리스크를 안겨주는 경비의 존재는 경비가 없어도 짜증 나는 상황에 빠진 플레이어를 더 짜증 나게 만듭니다. 쪽지가 도움을 주긴 하는데 그 쪽지를 얻는 것도 결국 여기저기 쑤셔 다녀야 하고, 지금 얻은 쪽지가 나한테 정말 필요한 쪽지인지 아닌지도 모르죠. 그리고 문제 제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이니까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 라는 흐름이 존재하는데 이게 보통 하나의 상황이 끝나면 다음 상황을 제시해야 유저가 알아서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 게임에서 현재 상황이 끝났음에도 다음 상황을 제시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유저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특정 지역에 도달하면 발생하는 스크립트를 발동시키기 위해 마구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게 한두 번 반복 되니 그런 상황이 오면 내가 뭘 놓쳐서 더 진행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스크립트를 발동하기 위해서 싸돌아다녀야 하나 재미없는 고민을 하게 되고, 이걸 검증하려면 의미 없이 모든 구역을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경비와의 숨바꼭질은 그저 그런 편입니다. 어차피 잠입 액션 게임도 아닌 이상 섬세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암네시아 머신 포 피그스처럼 구색 맞추기 용으로 넣는 게 아니라 아웃라스트 정도로 매끄럽게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죠) 하지만 전에 말한 요소들이 경비와의 조우를 그냥 짜증 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처럼 걸릴 듯 말 듯 한 긴장감보다는 그냥 쫓겨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관의 복도 구성이기 때문에. 원하는 목적지에 가고 싶은데 경비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어버립니다. 이런 레벨 디자인이 이미 플레이어가 어떤 방에 들어가 있으면 그럭저럭 잘 작동하지만, 플레이어가 복도에 있으면 거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각주:2] 거기에다가 AI 패턴이 유저를 추격하다가 놓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하므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기껏 도망쳤더니 가야 할 곳에 다시 경비가 와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점이 게임 진행을 더디게 만들어서 게임의 템포가 쓸데없이 늘어지게 됩니다. (신관은 엄폐물이 전혀 없는 홀 구조라서 경비와 마주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경비와의 만남은 짧고 강렬하다기보다는 구질구질할 정도로 자주 만나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보다는 그냥 약간의 정과 매우 많은 짜증이 섞인 태도로 대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얼굴 귀신은 원래 플레이어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짱박혀 있는 플레이를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정작 경비에게 한참 쫓기는 도중에 나와서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듭니다. 모르고 한 두 번 당할 때나 무섭지 몇 시간 내내 써먹기엔 부족한 귀신입니다.

 마지막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미궁은… 지도와 마커가 일상화되어있는 요즘 시대에 누가 미로에서 헤매면서 될 때까지 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다크소울처럼 실패에도 의미가 있는 게임도 아닌데 말이죠.


이야기도 썩 좋은 편이 못됩니다. 게임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딱히 없습니다. 줄거리에서 어른들의 이기심이라던가 강압적인 태도가 등장인물들의 썰이나 문서들로 간접적으로는 나오는데 귀신이 난무하는 학교라는 무대를 세팅하는 장치로 쓰이지, 주인공과 큰 상관은 없습니다. 거창하게 주제의식 같은 걸 따지지 않아도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줄거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소영이와 성아의 대립일 텐데 이마저도 딱히 내용은 없습니다. 가뜩이나 빈약한 이야기가 반전 때문에 이야기 마지막까지 숨기느라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둘이 어떤 문제가 있든 이것도 주인공에게는 그게 정말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귀신들이 잔뜩 있는데 등장하지도 않는 건너 알고 사람(소영이의 언니)에게 일어난 일이 뭔 상관일까요. 그저 남의 일입니다. 사실 이 게임의 줄거리는 아무런 야망도 없고 그냥 귀신이 돌아다니는 학교라는 배경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딱히 큰 무리수도 없고 그냥저냥 잘 작동하는 편입니다. 영화에서 영상을 위해 혼자 튀지 않고 그냥 제 역할을 하는 OST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좋은 건 아니지만 딱히 비판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있더라도 그럴 가치도 없고요.


 게임 내에 들어가 있는 컷신도 연출 하나도 없이 정직해서 3D게임 초창기를 보는 듯이 매우 밋밋합니다. 특히 QTE에서 밋밋한 카메라와 어정쩡한 애니메이션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몰입을 위해 작동해야 할 QTE가 오히려 몰입을 깨버립니다.


사실 이제 와서 화이트데이 IP가 부활한 것도 의문입니다. 뭐 나름 한국에서는 (한 줌 밖에 안되는) 게이머 사이에서 유명했던 게임이지만 이런 게임은 시장이 작은 한국보다는 더 큰 외국을 노려야 하는데 정작 게임을 팔아야 할 외국에서는 유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IP의 부활을 리메이크로 시작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그래픽은 갈아엎었지만, 게임플레이는 2001년의 원작에서 거의 달라진 게 없습니다. 번거로웠던 퍼즐 몇 개만 간편하게 손 본 정도입니다. 지금 하기에는 구린 게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기준에도 구린 게임입니다)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겠지만 이 게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처음 하는 사람들이 구린 게임을 이해해줄까요? 이 게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나올 프리퀄까지 팔아야 할 텐데 말이죠. 거기에 프리퀄에서도 연두 고등학교가 무대가 될 텐데 2001년에 만들어진 구린 레벨디자인을 그대로 다시 쓰인다면 최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음 작품은 잘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경험이 쌓여야 좋은 게임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못 만든 게임에 게이머들이 지갑을 열진 않을 테니까 말이죠.



  1. 화이트데이의 엔진인 왕리얼 엔진으로 만든 박 터트리기 멀티플레이 게임 [본문으로]
  2. 경비에 대해서 제가 클리어한 이후에 밸런스 패치가 있던 것 같습니다만 맵 구조 자체가 문제이니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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